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문단 편집) == 경력 == 바루스는 [[아프리카]]와 [[시리아]]의 총독을 역임하면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았다. 특히 시리아 총독 시절 [[헤롯 대왕]]이 사망하자 [[예루살렘]]을 점령해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2000명의 반란군을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 강경 진압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와 바루스라고 하면 치를 떨었다고 한다. 이후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형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들로, 재혼녀였던 아내 리비아와 그 전 남편의 아들들.]가 [[게르마니아 전쟁|체루스키족을 비롯한 게르만 부족을 정복]]하고, 아우구스투스는 바루스가 난폭한 숙주민들의 진압을 잘 하는 것을 전해듣고 [[게르마니아]]를 통치하기 위해 총독에 임명되었다. 사실 게르마니아는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형제가 여러 차례 정복사업을 펼쳐서 대다수의 게르만족 일파들이 복속을 한 상태였지만, 완전히 평정된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로마는 군사적으로 게르만족들을 복속시키고, 외교적 노력과 당근책을 이용해 친로마파 부족 포섭에 성공한 드루수스가 29살의 나이에 낙마사고로 요절해 국가 프로젝트를 담당한 핵심 멤버 중 티베리우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폭군]]으로 유명한 5대 황제 [[네로]]의 할아버지] 외엔 없었다. 다행이라면 카이사르, 아그리파 전례를 교과서로 활용해 게르만족들과 우호관계를 맺은 드루수스와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 역시 상호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복속 지역을 관리해 게르마니아 정복은 성공리에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헌데,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가 평정된 것으로 간주하고 게르마니아에서 활약하던 티베리우스를 [[발칸 반도]]의 반란 진압에 파견하고, 그 후임으로 바루스를 밀어넣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느 정도 게르마니아 정복이 끝났다고 생각한, 고령의 아우구스투스가 차기 황제로 점찍은 아그리파, 드루수스가 모두 죽자, 후임으로 또 다른 양자 티베리우스를 선정해 급히 로마로 소환한 다음, 1년 뒤엔 현지 상황을 그나마 알고 있던 누나의 사위 아헤노바르부스마저 소환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여기부터 시작되는데, 바루스는 군사적 재능이 없는 행정관료인 데다 현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조차 현저히 떨어졌다. 더 큰 불행은 바루스가 부임할 당시의 게르마니아 상황이었다. 티베리우스가 판노니아, 일리리아 반란을 진압하고 후계자 문제로 로마로 소환된 뒤, 그 뒤를 맡은 아헤노바르부스는 뛰어난 장군이고 시리아, 소아시아 일대에서 뛰어난 행정능력과 외교술을 선보인 젊은 행정가였다. 그런데 오랜 게르마니아 전쟁 경험에도 게르만족 사회의 복잡한 특수성과 현지 사정으로, 아헤노바르부스는 이 문제로 상당히 고전해 애를 먹고 있었다. 30대 중후반의 나이였던 아헤노바르부스는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었고, 1년 내내 꾸준히 승리를 거두는 성과를 낸 인재였다. 그런데 바루스보다 몇 배 이상 능력 있던 그마저도 로마인들의 사고로 게르만족들과 로마화 작업을 진행하다가 서로 오해가 쌓여,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가 노력해 쌓아 놓은 성과를 말아먹을 위기에 봉착했다. 즉, 로마가 조심스럽게 게르만족들을 로마화하려고 노력해도, 게르마니아 정복은 난이도가 상당했다. 헌데 바루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유능한 행정관료답게 행동하겠다며 드루수스, 티베리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모두 살얼음 위를 걷듯 행동한 게르만족 포섭에서 대형 실수를 저지른다. 그는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대화와 법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입장에서 게르만족의 로마화 작업에 착수했다. 이 때문에 로마가 기존 게르만 족장들을 모두 내쫓고 직접 다스리려 한다는 오해를 사게 된다. 전임자 아헤노바르부스조차 현지 사정을 알고 있어, 다른 속주 총독을 하던 시절처럼 업무를 하다가 곧 방법을 바꿔 몸을 사렸는데, 바루스는 한술 더 떠서 시리아에서 하던 행동을 그대로 하면서 반항하면 더 크게 응징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게르만 족장들은 점점 바루스의 통치방식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고, 과거 로마 장군들과 달리 자신들을 존중해주지 않는 바루스는 증오의 대상이 됐다. 게다가 바루스는 시리아 총독을 역임하던 시절처럼 게르만족에게 '''금과 귀금속으로 세금을 낼 것을 강요'''하였다. 문제는 게르마니아 지역은 금과 귀금속이 나올 만한 건덕지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세금에 큰 부담을 느낀 게르만족의 불만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 조세량 자체의 부담보다도, 장기간에 걸쳐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던 시리아에서는 금속 화폐가 흔하게 유통되었던 것과는 달리 부족 중심의 사회인 게르마니아 지방의 경제는 귀금속 화폐가 아닌 현물을 중심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바루스가 요구하는 대로 금 등의 귀금속으로 세금을 내려면 내부의 생산물을 외부에 내다 팔아서 귀금속 화폐를 구해 올 수 밖에 없는데... 이 경우, 현물을 내다 팔아 귀금속을 마련하고, 그것을 다시 세금으로 내야 하니 단순히 계산해도 조세 부담이 2배 이상 폭증하게 될 것이고, 공업과 상업이 덜 발달했던 게르만족의 입장에서 외부에 내다 팔아 귀금속과 바꿀 수 있는 생산물이 대체 뭐가 있겠는가? 식량이나 미가공 상태의 천연자원 정도밖에 없는데 이런 품목은 현대의 기준으로도 큰 이익을 내기 힘든 교역품이지만 운송 / 교역 기술의 부족으로 원거리 교역의 주축을 주로 사치품이 차지하던 시대에는 더욱 교역하기 어려운 품목이다.][* 당시 게르마니아는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울창한 숲이 전 국토를 뒤덮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미개척지가 많은 지형이었다는 소리고 농토에서 나오는 생산량이 부족한데다가 험지로 인해 교역도 부족하니 경제력 자체가 훨씬 적었을 것이다. 반면 시리아 지역은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으로 가장 강대한 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 제국의 영역에 속했었고, 당시 문화적으로 가장 발달한 지역 중 하나인 데다가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속주였으니 조세로 낼 금이나 귀금속을 얼마든 구할 수 있었다. 애초에 로마 입장에서 로마보다도 더욱 발전한 지역인 시리아에선 부를 뜯어내고, 훨씬 덜 발달한 게르마니아 지역은 국경을 안정화하고 우호적인 속주으로 만드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었음에도 멍청한 선택을 한 것이다. 사실 당시 가장 발달된 지역이던 아프리카와 시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그를 전혀 다른 환경인 게르마니아 지역에 배치한 것 자체가 실수다. 게르마니아 지역에 필요한 총독은 군사/외교 전문가였지 행정가가 아니었다.] 결국 이러한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게르마니아에서 반란이 터지게 되고, 바루스는 게르마니아의 총독으로서 17, 18, 19군단을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